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척 예거 (문단 편집) === 전후 === [[파일:external/thewashingmachinepost.net/ChuckYeager.jpg]] 2차대전 이후 1946년 육군항공 개발시험 비행조종사 훈련을 이수하고 [[테스트 파일럿]]으로 각종 시험기를 조종하였다. 당시 동료들도 '''[[디크 슬레이튼]], [[거스 그리섬]], [[고든 쿠퍼]]'''[* 머큐리 세븐 중 공군 출신인 세 명이다. 나머지 넷은 해군 출신인 [[앨런 셰퍼드]], [[월리 시라]], [[스캇 카펜터]]와 해병대 출신인 [[존 글렌]].] 등의 쟁쟁한 인물들이다. 미 육군항공대의 아음속항공기 시험조종사로 선발되어 1947년 10월 14일 [[X-1]] 로켓항공기로 세계 최초로 음속을 돌파했다. 그의 음속돌파는 1947년 9월 18일 육군항공대가 공군으로 독립한 직후라 의미가 컸다. 그는 원래 2차대전의 에이스 미국의 전쟁영웅으로도 유명했지만 [[초음속]] 기록돌파가 대대적 언론을 타며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얻어 전후 미 공군이나 항공업계의 얼굴마담이 되었고 이런 초기 항공기술 시험조종사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필사의 도전(영화)|필사의 도전]]으로 대중적인 스타가 되었다. 여기에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으니, 비행 이틀 전 [[말(동물)|말]]을 타다 넘어져 갈비뼈가 2개나 부러졌는데 일반 외과에 갔다가는 의사의 신고로 비행업무에서 배제될까봐 [[수의사]]에게 가서 치료를 받고[* 뼈가 대상이라 위에 덮인 살을 가위로 짼 다음 뼈를 절개하고 붙이고 고정하고 짼 살을 꿰매면 끝인, 난이도는 비교적 높지 않은 수술이다. 외국에서는 시험에 합격한 소수의 '''[[간호사]]가 간단한 처방이나 수술을 대행'''하는데 그 수술 목록에 들어가는 정도. 다만 흉막공간은 그래도 꼼꼼하지 않으면 복막부터 어딜 절개할 지를 모르니 다리 쪽보단 약간 위험성이 있다. 오히려 사람 진료경험이 적은 마취나 [[쇼크]]가 문제였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저혈압성 쇼크나 상처 고름이나 특히 마취제의 용량이 문제가 되었을 뻔 했는데 다행히 잘 넘긴 편. 어쩌면 영장류에 관한 기록을 갖고 있었거나 인간의 마취 관련 도서를 한 권 구매해서 상세한 당 용량을 봤을 수도 있다.] 부인과 가장 친한 동료 한사람에게만 이야기 했다고. 그래서 조종을 할 때도 갈비뼈 수술로 인한 통증으로 인해 작대기로 레버를 조작했다고 한다. 6.25 전쟁 직후 [[북한 공군]]의 노금석 소위가 [[MiG-15]] 전투기를 몰고 [[귀순]]하자 몰고 온 기체를 시험평가 하기도 했다. 1955년 독일 주둔 제50전투폭격 비행단 417전투폭격 비행대대장([[F-86]]H 세이버)으로 부임했다. 2년 후인 1957년에는 캘리포니아 주둔 제413전투비행단 1전투비행대대장([[F-100]]D 슈퍼세이버)으로 부임했다. [[우주 경쟁]]이 시작되자 시험비행사 동료들이 [[우주 비행사]]로 선발돼서 엄청난 인기와 부를 거머쥘 때도 그는 대학 졸업장이 없다는 걸림돌 때문에 우주비행사가 되지 못했다.[* 다만 예거를 비롯해 일부 테스트 파일럿들은 모름지기 파일럿이라면 우주에 갈 때 '''조종'''을 해서 가야지 머큐리처럼 짐짝처럼 얹혀서 올라갔다 짐짝처럼 떨어지는 것은 간지나지 않는다고 깎아내렸다. 대중에게 엄청 유명한 점은 아니지만 '''조종'''을 해서 우주에 진출한 최초의 기록은 미국의 X-15 테스트 파일럿 [[로버트 화이트]]와 [[조셉 워커]], [[조 엥글]] 등이 가지고 있다.] 다만 여기에 대해서는 설명이 좀 필요한데, 당시 NASA가 우주비행사들을 대졸자(특히 자연과학 또는 공학 전공)로 한정한 것은 단순히 학력차별이 아니라, 그 당시 우주비행사들에게 요구한 역할이 단순히 우주선에 타고 우주에 갔다오는 것에 그치지 않고 우주선과 로켓 연구/개발 단계에서부터 실제적으로 참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닐 암스트롱]]을 비롯한 많은 초창기 우주비행사들은 문레이스에서 공학자로서의 역할을 같이 요구받았고, 또한 그 요구에 실제로 부합했다. 이 당시 척 예거와 초창기 우주 비행사들의 이야기를 다룬 게 1983년작 영화 《[[필사의 도전(영화)|필사의 도전]]》. 1962년 미 공군대학 졸업 후 미 공군 개발시험 비행조종학교장으로 부임했다. 1966년 필리핀 주둔 제405전술전투비행단장(B-57 캔버라)으로 부임하여, 비행단과 함께 [[베트남 전쟁|월남전]] 파병을 다녀오기도 했다. 1968년 미 노스캐롤라이나 주 제4전술전투비행단장([[F-4 팬텀 II]])으로 부임하여 [[푸에블로호 피랍사건]]에 대응하기 위해 한국 파병을 다녀오기도 했다. 1969년 [[준장]]으로 진급, 미 제17공군 부사령관을 역임했다. 1971~1973년 사이에는 주파키스탄 미국 대사관 무관으로 파키스탄 공군 군사고문관직을 맡았다. 1975년 퇴역 후 미 항공우주국 시험비행 조종사로 근무했다. [[고졸]]의 사병 출신으로 준장까지 진급한 흔치 않은 케이스. 2차대전 중 파일럿의 부족으로 사병 중에서 파일럿을 모집해서 훈련시킨 후 항공준사관(Flight Officer)으로 임관시켰는데, 육군 항공정비병 근무 중 여기 지원했고, 2차대전이 끝날 무렵에는 [[대위]]까지 진급했다. 본인의 자서전에 의하면 이런 경력 때문에 알게 모르게 차별을 좀 받은 모양이다. [[미합중국 공군]]이 아무래도 늦게 생기고[* 미 공군이 생기기 전에는 육군 항공대와 해군 항공대가 따로 존재하였다. 좀 쉽게 설명하면 해군의 해병대 같은 이미지.] 기술군이다보니 이런 경향이 두드러진 모양인 듯. 결정적으로 미국 최초의 우주 비행사 선발시 대학졸업장이 없어서 애시당초 의지에 상관없이 원서도 못 썼다.[* [[머큐리 계획|머큐리]] 우주비행사의 자격 요건에는 [[대졸]]인 미군 [[파일럿]]이라는 항목이 있었다. 일단 대학 졸업장을 (예비역) 병으로 입대한 뒤 장학금을 받든지 해서 대학에 갔다가 장교로 임관하는 방법이 있긴 하다. 실제로 오늘날 미군에서는 그렇게 해서 장교가 되는 경우도 흔하고, 그런 사례 중에 [[우주 비행사]] 선발 사례도 있다.([[STS-51-L]] 사령관이었던 딕 스코비의 사례) 하지만 입대 당시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예거에게는 그런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비행사 자질 평가에 대해선 나름대로 확고해서 흑인 비행사 뽑으라는 지시에 비행사 지원 인원 중에서는 우수한 흑인 비행사는 없다고 보고했다고 한다. 인종 차별이 아니라 그때 흑인 교육생 실력이 모자랐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실제로 독일에서 함께 근무했던 흑인 조종사들보다 실력이 떨어졌다고 평가했다고.[* 그렇다면 [[터스키기 에어맨]]들과 함께 근무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 부대는 '''호위하는 폭격기 손실 0'''에다 '''프롭기로 [[Me262|제트기]]를 잡은''' 전적도 있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붉은 [[꼬리날개]]의 천사들'.] 이후 [[제너럴 모터스]]의 기술 및 홍보 고문으로 취업해 일하면서 1985년 [[앨버트 웨드마이어]] 장군과 함께 [[미국 대통령 자유 훈장]]을 받았으며 1986년에는 [[STS-51-L]] 우주왕복선 챌린저 폭발사고가 터지자 진상조사를 위해 꾸려진 로저스 위원회에 참여하기도 했다. 당시 같이 활동한 인물들 중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인 [[닐 암스트롱]], [[샐리 라이드]], [[리처드 파인만]]과 함께 얼굴마담 노릇을 했다.[* 그러나 이들 중 가장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인물은 암 투병 중 서부에서 추운 워싱턴 DC까지 끌려와서 골골대던 파인만이었다. 사실 척 예거와 두 우주인과 파인만은 대중의 관심을 끌기 위해 영입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